교과서 속 중앙은행은 참 편리한 세상에 살아요. 합리적 기대를 가진 경제에서는 물가를 잡겠다고 성장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성립하거든요. 그런데 IMF 워킹페이퍼 WP/26/167호는 여기에 딱 하나의 변수를 추가했습니다. 바로 ‘기억’이에요. 그 기억 하나가 더해지자 교과서 속 편리한 세상은 사라지고, 중앙은행은 정상보다 더 높은 금리와 마이너스 산출갭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됐어요. 왜 겪어본 인플레이션만 이렇게 무서운 걸까요?
신의 일치(divine coincidence)란 어떤 벤치마크인가?
신의 일치는 합리적 기대를 가진 뉴케인지언 모델에서, 중앙은행이 산출갭을 전혀 희생하지 않고도 인플레이션을 목표치에 완전히 묶어둘 수 있다는 결과를 말해요. 이 논문의 섹션 2에 등장하는 3방정식 뉴케인지언 모델(IS곡선, 필립스곡선, 통화정책 준칙으로 구성된 표준적인 거시경제 모델)에서, 모든 경제주체가 미래를 합리적으로 예측한다고 가정하면 물가 안정과 경기 안정이라는 두 목표가 서로 충돌하지 않아요.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금리를 올려도 그 자체로 산출을 깎아 먹지 않는, 정책 담당자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세계인 셈이죠. 문제는 이 결과가 ‘사람들이 과거를 완전히 잊고 오직 미래에 대한 합리적 예측만으로 기대를 형성한다’는 전제 위에 서 있다는 데 있어요.
그런데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한다면 어떻게 달라지나?
과거 고인플레이션과 포퓰리즘의 기억이 남아있으면, 인플레이션을 목표에 묶어두기 위해 정책금리를 정상 수준보다 높게, 산출갭은 마이너스로 만들어야 합니다. 이 논문은 이 ‘기억’을 감가율 λ라는 하나의 모수로 모델에 집어넣었어요. λ가 작을수록 과거의 기억이 오래도록 희미해지지 않고 남아있고, λ가 클수록 그 기억이 빠르게 잊혀 경제가 신의 일치가 성립하는 정상 궤도로 더 빨리 돌아가요.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중앙은행의 말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하고, 실제로 금리가 눈에 띄게 오르는 걸 봐야 비로소 인플레이션 기대를 낮춰요. 그러니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똑같은 인플레이션 기대 이탈에 대응하더라도, 기억이 없는 나라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금리를 움직여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거예요. 과거의 그림자가 오늘의 안정화 비용을 끌어올린다는 게 이 모델의 핵심 메시지예요.
이 ‘경험 학습’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왔나?
경험 학습은 사람들이 통계적으로 주어진 모든 정보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고,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에 유독 더 큰 가중치를 둔다는 이론이에요. Malmendier와 Nagel의 연구 계보에서 발전한 개념으로, 예를 들어 대공황을 겪은 세대는 이후 평생 주식 투자를 꺼리는 경향을 보인다는 식의 실증 연구가 대표적이에요. 이 논문은 같은 논리를 중앙은행이라는 기관 단위로 확장했어요. 개인이 아니라 한 나라의 통화정책 결정 과정 자체가, 그 나라가 과거에 겪은 고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 화폐화의 경험을 ‘학습’해서 오늘의 정책 반응 강도를 조정한다고 본 거죠.
이 이론은 실제 데이터로도 확인됐나?
이 모델의 예측은 실제 32개 인플레이션 타겟팅 국가의 정책금리 데이터로도 확인됩니다. 과거에 좌파 포퓰리즘과 높은 수준의 중앙은행 대출을 함께 겪은 나라의 중앙은행은, 오늘날 인플레이션 기대가 목표치에서 벗어날 때 그런 경험이 없는 나라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반응했어요. 더 흥미로운 건 이 효과가 단순히 ‘과거에 인플레이션이 높았다’는 이력을 통제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에요. 즉 순수하게 높았던 물가 자체의 기억과는 별개로,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경험이 남긴 독립적인 채널이 존재한다는 뜻이죠. 결국 겪어본 인플레이션만 무서운 이유는, 그 경험이 단순한 과거 통계가 아니라 오늘의 금리 결정에 여전히 살아있는 가중치로 작동하기 때문이에요.
출처
- Jácome, Luis I., Nicolás E. Magud, Samuel Pienknagura, and Martín Uribe. “Fiscal Populism and Monetary Policy Rules.” IMF Working Paper No. 26/167, International Monetary Fund, August 2026.
자주 묻는 질문
Q1. '신의 일치(divine coincidence)'란 무엇인가요?
합리적 기대를 가진 경제에서는 중앙은행이 산출갭을 희생하지 않고도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목표치에 묶어둘 수 있다는 뉴케인지언 모델의 결과예요. 물가 안정과 산출 안정이라는 두 목표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동시에 달성된다는 뜻에서 '신의 일치'라고 불려요.
Q2. 경험 학습(experienced learning)이란 무엇인가요?
경험 학습은 사람들이 통계적으로 주어진 모든 정보를 동일하게 쓰는 게 아니라,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에 더 큰 가중치를 두고 기대를 형성한다는 이론이에요. Malmendier와 Nagel의 연구 계보에서 나온 개념으로, 이 논문은 이를 중앙은행의 정책 결정에 적용했어요.
Q3. 과거 인플레이션의 기억이 남아있으면 통화정책이 왜 달라지나요?
기억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을 목표에 묶어두려면 정책금리를 정상 수준보다 높게, 산출갭은 마이너스로 만들어야 해요. 즉 과거의 그림자가 남아있는 한 물가 안정을 위해 오늘의 성장을 희생해야 하는 비용이 추가로 생긴다는 뜻이에요.
Q4. 이 모델에서 '기억의 감가율(λ)'은 무슨 역할을 하나요?
λ는 과거 경험이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나 빨리 잊히는지를 나타내는 모수예요. λ가 작을수록 과거의 기억이 오래 남아 현재 통화정책에 더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고, λ가 클수록 기억이 빨리 희석돼 정책이 정상적인 궤도로 더 빨리 돌아가요.
Q5. 이 이론은 실제 데이터로도 확인됐나요?
네, 과거에 좌파 포퓰리즘과 높은 수준의 중앙은행 대출(재정적자 화폐화)을 함께 겪은 나라의 중앙은행이 오늘날 인플레이션 기대가 목표에서 벗어날 때 훨씬 더 공격적으로 반응한다는 실증 결과로 확인됐어요. 이 효과는 과거 인플레이션 이력 자체를 통제해도 사라지지 않는 별개의 채널이에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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